제10장: 강철과 잿물
분노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후인 장교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한 치의 망설임도, 감정도 없었다. 오직 강철 같은 사실의 나열만이 존재했다.
"너희의 도망친 왕은, 우리가 이미 사로잡았다. 곧 이곳으로 데려와 새로운 조선의 시작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땅, 너희의 고향 위에 새로운 도읍을 세우고, 이곳을 발판 삼아 이 땅의 모든 왜군을 몰아낼 것이다. 그것이 너희의 구원이 시작되는 날일 것이다."
웅성거림이 전인들 사이에서 파도처럼 번졌다. 왕을 사로잡았다는 충격적인 소식. 왜군을 몰아내 준다는 기묘한 약속. 하지만 한솔은 그 말들 속에서 더 깊은 절망을 읽었다. 저들은 왕을 시해하지 않았다. 왕을 내세워 이 땅의 정통성을 훔치려는 것이다. 구원? 그것은 정복을 위한 가장 교활한 명분일 뿐이었다.
장교는 전인들의 혼란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말을 뱉었다.
"일단 이번 달까지, 너희 전인부대는 이곳의 진지와 도시를 구축한다. 노동 역시 훈련의 일부다.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그날부터 한솔의 손에 들린 것은 소총이 아닌, 기이한 모양의 쇠 삽이었다. 그는 다른 전인들과 함께 폐허의 잔해를 치우고, 땅을 파고, 무거운 자재를 날랐다. 휴식은 없었고, 식사는 여전히 멀건 죽뿐이었다. 그들의 노동은 마치 거대한 개미 군단처럼, 폐허가 된 한성의 풍경을 하루가 다르게 바꾸어 놓았다.
한솔은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을 배우고 만져야 했다. 그들은 회색 가루에 물을 섞어 질척한 잿물을 만들었고, 그 잿물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나무 기둥 대신, 사람 뼈처럼 생긴 길고 단단한 쇠 막대기를 엮어 건물의 뼈대를 세웠다. 모든 것은 기이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기와 장인이 평생을 바쳐 지을 집 한 채가, 이곳에서는 불과 며칠 만에 뚝딱 만들어졌다.
고된 노동 속에서 한솔의 몸은 기계처럼 무감각해져 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깨어 있었다. 그는 묵묵히 잿물을 섞고, 쇠 막대기를 나르면서 후인들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귀에 담았다. 그들의 건축 방식, 그들의 도구, 그들의 언어. 이 지옥의 법칙을 이해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내 가족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이 흉물스러운 도시를 내 손으로 무너뜨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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